
“그게 네 선택이야, 샌즈?”
그녀는 홀 밖으로 나간 게 아니었다. 문 앞에서 내 반응을 기다린 게 틀림없었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난 아직도 내 의식의 주인이 내가 될 수 있는지 확신이 안 서. 날 죽일 거면 지금이 기회야.“
나는 한참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네가 맘에 들어 할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그녀가 지금은 밖으로 나가고 없다는데 도박을 걸고 뒤를 돌아봤다.
다행이네.
그게 내가 들은 그녀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말도 없이 떠났으니.
그리고 운명의 장난처럼, 하필이면 사람이 드문 전철에서 우린 다시 만났다.
***
벚꽃이 창밖을 이슬비처럼 가로질러도, 폭염이 찾아오고 매미가 울어도, 장마가 시작되어도, 낙엽이 떨어져도, 눈이 오고 옷은 두꺼워져도, 뽀얀 입김이 겨울 공기에 섞여 사라져도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우리는 거울처럼 일치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사실이 나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는 이루 말할 것이 없다.
너는 내 속마음을 알고 있을까. 표현하지 않았는데, 알 수 있을 리가.
아직 서로 이야기 한번 나누지 않았다. 눈이 몇 번 얽힌 적이 있었다(그녀의 눈이 워낙 특이해서 얽힌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때마다 미소를 지으려고 애썼지만 빌어먹을 내 입은 쉽게 움직여주지 않았다.
확신만은 있었다. 누가 먼저 얘기를 꺼내 든, 대화한다면 어떤 주제라도 생이별한 쌍둥이처럼 일치할 것이라고. 서로 유일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서로가 남의 고통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남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떳떳하게 말하지 못한 것, 감정 뒤편으로 숨겨왔던 후회. 생각할수록 죄악감과 미안함이 한데 뒤섞여 가슴이 아프다. 징, 하고 울리는 것만 같다.
서로를 정말 필요로 하게 될 만큼 외로워질 때까지 참아 두자. 그런 대화를 한 것만 같았다.
그날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흐릿하다. 내 용기를 몽땅 쏟아서 대화라고 하긴 창피한, 혼잣말에 가까운 말을 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생각은 해봤는데... 뭐, 답은 정해져 있던 거 아냐? 네 말마따나 싫은 감정보다 좋은 감정을 감추는 게 더 어려운 일인데, 그렇다고 내가 너를 미워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너 자신이 혹여 나에게 누가 될까 너는 그렇게 전전긍긍을 하는데 내가 어떻게 너를 계속 욕심만 낼 수 있겠어.”
“…….”
“내가 나만의 착각 속에서 너를 무너뜨린 것, 네가...”
또, 또... 이 멍청한 뼈다귀야. ‘네가’라니.
나는 오만했다. 내 눈 앞에 펼쳐졌던 한 번의 몰살이, 나 때문이라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그녀가 다시 모든 것을 바로잡으려고 수많은 여정을 반복할 때, 깨달아야 했었다. 그녀가 져야 할 책임은, 모두 내 몫이라는 것을. 그녀가 내게 건낸 사과의 무게가, 감당 못 할 만큼 무거웠다는 것을.
“아니, 정확히는 네가 아니었겠지만, 나를 비롯한 모든 괴물을 죽인 것. 어느 것이 죄질이 더 큰지 저울질도 못 하겠다.”
투둑.
굵은 장대비가 차창을 힘차게 때리기 시작했다.
"둘만 아는 사실이라면, 조용히 묻어두고 싶어. 그리고 그게 조금씩 밖으로 새어 나와도 태연하게 넘어가고 싶어.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너와 함께.”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왔는지 나로서도 알 수 없었다. 이런 행동으로 어떤 결과를 얻을 수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이제 장대비 소리는 내 자그마한 말소리를 묻기에 충분했다.
“미안해, 미안해... 프리스크.”
그녀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들은 것 같았다.
며칠 뒤, 그녀는 전철 안에서도 사라졌다. 이 상황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뭐라고 받아들여야 할까. 더는 서로가 필요하지 않게 되어버린 게 아닐까.
복잡한 마음을 지닌 채로, 여름이 끝나기 전 전차를 탔다.
계속 같은 곳에 서서 종점까지 흘러내려 왔다. 걱정만 잔뜩 끼치고 이런 곳에 혼자 남겨두다니. 너무하기도 하지. 차마 원망은 하지 못하고 전차를 나갔다.
아침에 파피랑 한 다녀오겠다는 약속...
오늘만 지키지 말까. 다음에는 어기지 않겠다고 할까.
내게 다음이 있을까.
몽롱하게 생각했다.
그때, 뒤에서 어깨를 잡혔다. 시야가 탁 트였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난다. 목뼈가 따끔거렸다.
잘못 삼킨 감정이 흘러나왔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생각하는 수 초 동안 끝나지 않은 방송이 귓가로 흘러왔다.
종점입니다.
"내가 누군지 절대로 잊지 않을게. 너도 네 자신이 누군지 절대로 잊지 말아줘."
From. 수풀
@UT_inthebu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