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드, 리셋, 의지.
[하루를 끝마칠 때, 정신을 차려보면 - 아무것도 남지 않은 오늘을 후회하면서 내팽개쳐버려. 언제나 난 혼자 남아서, 변하지 않은 채로 있어.]
그건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둘의 차이점이 있다면 아이는 솔직했다는 것이었고, 그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도망치기로 했어. 뜨거운 여름의 끝자락을 지날 때 즈음 나는 결심했어. 우리가 함께 웃었던 날들의 기억을 두고, 저 멀리 뛰어가기로. 앞이 보이지 않아도, 다른 친구들이 없어도, 샌즈가 없어도, 나 혼자 가기로.]
[있지, 샌즈? 이건 샌즈 탓이 아니야. 원래부터 난 떠나려고 생각했었으니까. 나는 이곳에 필요 없는걸. 며칠 전 차라가 날 통해 했던 행동은 내게 정말로 떠날 계기를 준 것뿐이야. 그래서.... 응, 약속할게. 지금은 떠나지만, 언젠간 꼭 다시 만나자. 그때는, 이 쓰라린 가을의 끝자락을 훌훌 털고, 웃으면서 만나길 바라. 진심으로.]
꾹꾹 눌러담아 쓴 편지는, 아이가 펜 끝으로 피를 흘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진심이 담겨있었다. 군데군데 번진 글씨들이 은빛으로 빛나는 두 동공에 밟힐 때마다 작은 해골의 심장이 - 소울하트가, 산산조각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약 7년이 다 되어갔다. 꼬맹이가 사라진 지, 그가 아이의 웃음소리를 듣지 못한지 벌써.
그 아이는 예전의 미소를 잃지 않았을까, 하고 걱정이 되었다. 힘들고 끔찍하던 그 시간선 중에서도 아이는 특유의 미소를 잃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던 그였다.
[내가 있는 곳에서... 항상 떠올릴 거야. 특히 샌즈를. 샌즈의 바보 같은 웃음이, 목소리가,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샌즈.]
자신의 이름을 한글자 한글자 눌러 적던 아이의 마음에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하고 문득 궁금해졌다.
[괜찮아, 샌즈. 계속 웃어주길 바라. 나도 그럴 거야. 넘어져도 앞만 보고, 창피해도 신경 쓰지 않을거야.]
편지에 떨어진 눈물 자국들이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그걸 봐야 하는 샌즈의 마음 또한 아프기 시작했다.
[...그러고 싶어. 하지만 있지, 샌즈. 나는 샌즈가 날 보고 싶어 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 이 편지가 읽히고 잊힐까 봐 무서워. 그래서, 말하고 싶었어. 계속 함께 있어달라고, 나를 붙잡아달라고.]
떨어지는 꽃잎 같던 아이의 필체에는 어느새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만큼 괴로웠겠지, 라는 생각과 함께 쓴웃음이 그의 입가를 장식했다.
[듣고 싶을 거야. 많이. 샌즈의 목소리. 지금은, 내가 이곳에 올 수 없지만, 언젠가는 샌즈를 만날 날을 생각하며 이 편지를 끼적여. 언젠가, 먼 미래에- 우리가 오늘을 떠올릴 때, 미소가 사라지지 않도록. 그러길 빌어. 추운 겨울의 끝자락도 이겨내길 바라.]
떨어진 낙엽들 위로 그가 한 걸음씩 내디딜 때, 붉은 빛으로 물든 나뭇잎들이 바스락거리며 그 대신 눈물을 흘려주었다. 깊은 한숨이 나무의 잎사귀를 흔들 때, 그의 뒤로 작은 발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다.
꼬맹이가 있었다.
전보다는 더 성장했지만, 입가의 걸린 미소는 마찬가지인 채로.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그의 앞으로 한 걸음씩 걸어오고 있었다.
가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부슬부슬, 그의 후드티를, 아이의 머리칼을 천천히 적시며. 그의 마음 또한 천천히 젖어왔다. 그가 여태까지 흘렸던 눈물처럼.
그는 말없이 아이의 편지를 품으로 숨겼다.
쓰라린 가을의 끝자락. 푸른 하늘을 가진, 시원한 가을의 시작.
오늘 날씨는 맑음.
그의 마음또한, 맑음.
가을이 시작되었다.
From. 민초령
@helloskye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