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익숙한 번호, 익숙한 이름. 고민할 것도 없었다. 이미 짐 정리를 마친 후였고, 할 일이라곤 그저 다디단 초콜릿을 씹어먹는 것뿐이었기에. '응, 왜?' 짤막하게 답을 보내고 답신을 기다리는 동안, 인간은 시간이 참으로 느리게 흐른다고 생각했다. 고작 1, 2분 정도의 기다림이었음에도 말이다. 왜 이렇게 조급한 거지? 손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액정에 메시지 표시가 뜬다. 역시나, 고민할 것 없다. 이제는 완전한 어둠으로 가라앉은 조용한 밤. 집을 나와 걸음을 재촉한다. 인간은 담담하게 걸었다. 계속해서 걸었다.
왜 그렇게 숨을 몰아쉬어. 뛰어온 거야?
사실은 아니다. 담담한 척했던 것이 무너지도록 미친 듯이. 미친 듯이, 가로등 하나 있는 조용한 공원까지 쉬지도 않고 응, 달려왔다. 오는 내내 찬 바람에 얼굴을 그대로 맞은 탓인지 코끝이 새빨갛다. 아니, 정정하자. 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다. 달아올랐다¿
흘리듯 내뱉는 웃음소리.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샌즈는 프리스크의 모습이 썩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꼭 술 취한 사람처럼 얼굴이 시뻘게져서는 코를 훌쩍이는 모습 같은 게 말이다. 프리스크는 문득, 샌즈의 웃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웃지 마, 다시 한번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웃는 소리가 또다시 들려온다. 웃지 마라니까, 웃지 마라니까.
슬슬 돌아가야겠다고, 인간은 생각했다. 젖은 다리가 괴로울 정도로 시린 탓에 어쩔 수 없다며.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니 모래가 우수수 떨어진다. 남은 것마저 털어내고 마지막으로 바다를 바라보니 파도가 좀 전보다 거칠다. 휩쓸려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실없는 생각. 인간은 웃었다. 정말로, 휩쓸려 갈 것 같다. 듣는 이 없는 중얼거림. 파도 소리에 묻혀 자신조차도 제대로 듣지 못 하는 그런, 부질없는 소리. 인간은 완전히 몸을 돌려 바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계단을 오른다.
할 말 있어, 샌즈.
프리스크는 예상했다. 샌즈가 자신에게 연락한 이유는 그저,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함이라고. 당연하게도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샌즈는 프리스크에게 정말로 가벼운 인사만을 건넸고, 그 이후엔 실없는 농담을 뱉어낼 뿐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예상했던 일이니까, 괜찮았다. 인사를 나누는 도중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날. 그러니까, 떠나기 전날에 샌즈와 함께 첫눈을 바라보게 되어 기쁘다고, 프리스크는 생각했다. 이 작은 해골, 뼈다귀 샌즈와 함께하는 마지막이.
그래서 일지도 모른다. 여태껏 잘 숨겨왔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것은, 말하지 않고도 지나갈 수 있던 문제를 꺼내버린 것은. 그래, 프리스크는 순간의 욕심을 누르지 못했다. 샌즈가 어떤 존재인지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 어떤 답을 듣게 될지 알고 있으면서도 프리스크는, 자신의 욕심에 지고 말았다.
하지 마.
이 역시 뻔한 결과였다.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어깨를 으쓱일 뿐인 샌즈에게서, 프리스크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샌즈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티를 내지 않은 것은, 그래. 프리스크라는 사람이 샌즈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둘은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정말로 뻔한 결과다. 단호했던 한마디와는 다르게 샌즈의 표정은 여유롭기 그지없다. 프리스크 역시, 딱히 이렇다 할 감정은 느끼지 못 했다. 그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일 뿐. 둘은 잠깐 동안 침묵을 가지고 곧, 각자 갈 길을 걸었다.
그 날, 인간은 잠을 한숨도 자지 못 했다. 그렇게 결국 아침이 찾아왔고, 떠나기 전에 인간은 집 앞에서 그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배웅 나오겠다는 그녀를 말리느라 진땀을 빼긴 했지만 뭐,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 즐거웠을지도 모른다. 끝까지 상냥하고 따뜻했던 엄마, 인간은 짐 가방을 끌고 차에 올라탔다. 이제 진짜로 이별이다. 가족과 친구들, 모두와.
샌즈.
계단을 오르는 동안 파도 소리가 잠잠해졌다. 그 잠잠한 틈 사이로 인간은 저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차, 듣는 이 없는 소리였음에도 인간은 순간적으로 입을 꾹 닫을 수밖에 없었다. 곧바로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보니 시선이 바다에 닿았고, 인간은 계단을 오르던 발을 멈추게 되었다. 온 바다가 잠잠하다. 인간은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이나 바다를 바라봤다. 잔잔하게 일렁이는 바다. 사방이 어두워 잠식할 것만 같다고, 인간은 생각했다. 문득, 밖으로 나오기 전에 내려둔 커피 생각이 났다. 지금쯤이면 다 식었겠구나, 다시 데워야겠는걸. 인간은 바다에게 남은 미련을 지우고 고개를 돌려 계단을 오르기 위해 발을 떼었다. 그 순간
프리스크?
겨울의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From. 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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