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점입니다
무심한 방송이 울린다. 느릿하게 열리는 문 앞에서, 역의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가 아직 완전히 그치지 않았는지 물방울이 듬성듬성 떨어지고 있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비 오는 날의 오후, 문득 이렇게 우산을 들고 나가고 싶어진 건 잿빛 구름 아래 펼쳐진 세상에 기대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끌려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긴 우산은 아직 마르지 않아서 물이 툭툭 떨어졌다. 내 반바지에는 젖은 자국이 가득했고 하얀 정강이뼈에는 물방울이 흐르고 있었다. 느낌이 썩 좋진 않았다.
머릿속이 빗물로 가득 찬 듯했다. 머리를 들자니 무겁고, 조금만 움직여도 찰랑거려서 넘치기 직전이다. 띵하고 어지러웠다.
장마가 끝나가는 이때, 종점까지 올 동안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나와 다르게 의미 있는 활동을 하러 갔겠지. 친구를 만나러 가거나, 일하러 가거나.
멍해 있던 도중에 열린 문은 이제 닫히려고 했다.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서 문틈 사이를 비집다시피 전차 바깥으로 발을 내밀었다. 약한 흔들림과 귀가 먹먹한 소음에 덮쳐졌다.
***
언제나 시야 밖에 있는 것은 곧 익숙함이 되기 마련이다. 안도감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익숙함이 조금 바뀐 것만으로도 불안해져 버린다. 그것마저 시간만 좀 지나면 무뎌지기 마련이다.
몇 달간 전차에서 마주 보고 앉아있던 그녀가 없어져 버렸다. 오늘로 사흘, 또 다른 익숙함이 되기 전에 와주길 바랐다. 이렇게 익숙해져 버린 게 너무 많아서, 더는 쌓고 싶지 않았다. 남도 아닌 그녀가 그렇게 쌓인 무더기 일부가 되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았다.
이런 무언의 약속은 또다시 나만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지상에 나와서, 대사라는 직위를 거부하고 어디론가 가야 할 곳이 있다고 했을 때 알아챘어야 했다.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그녀는 갈 곳도, 가야 할 곳도, 책임도, 의무도 없는 몸이었다.
***
그녀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모든 괴물이 인간에게 수소문하고 찾아다녔지만, 그녀를 봤다고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계획된 일인가 싶을 정도로 깔끔했다. 긴 시간이 지나고, 그렇게 모두가 추억 속에서만 그녀를 기억하고 있던 때에, 나는 양치기와 떨어진 양처럼 이리저리 방황했다.
“형, 어디가?”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오늘도?”
“집 잘 보고 있어, 다녀올게.”
매일 아침을 이렇게 시작한다. 그러나 시작을 끝맺는 대화는 사라진 지 오래다.
***
끼익-
전차가 금속 소리를 내며 역으로 들어왔다. 눈앞을 빠르게 지나가는 창문 너머로 탑승객들의 모습이 휙휙 지나갔다. 아마 그때 내가 눈을 뜨고 있었더라면, 그 뒤로 벌어질 일이 달라졌을까? 문이 열리고, 기계적으로 탑승했다.
복작복작한 사람들의 틈에서, 어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설마...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이미 문은 그런 내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굳게 닫혀 있었다. 자리가 꽤 많이 비어있었지만, 앉을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맞은편에 있는 기둥에 기대어 섰다. 그녀가 나를 알아채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살얼음판 걷는 심정으로 전철을 탔다.
마주 보고 앉은 그녀는 자리가 마음에 들었던 듯 언제나 그 자리에 붙어 있었다. 언제나 같은 시간, 같은 전차, 같은 자리였다. 그녀 때문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 맞은편 기둥에 마법처럼 이끌렸던 탓에, 그녀와 나 사이에 흐르는 침묵 너머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맞서기보다 피하기에 익숙한 나에게, 이것이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그래, 뭐, 알아채지 못하게 해달라는 소망은 과했다. 그녀는 나에 대해서 잊은 듯했다. 잊은 척했겠지. 나를 위해.
복도 끝에서, 꼬맹이가 보였다. 나는 농담과 진담을 반씩 섞어서 말을 걸었다.
"안녕, 꼬맹아. 여행은 즐거웠어?"
천천히 다가오던 그녀는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가, 성큼성큼 내게 오면서 말했다.
“싫은 감정보다 좋은 감정을 감추는 게 더 어려운 거 같아."
그녀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내 옆을 휭 지나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걸 본다면…. 정말 그런거 같아."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미안해, 샌즈. 용서는 바라지 않을게. 내가 다 짊어지고 갈 테니까. 만약... 네가 정 불안하다면, 내가 여길 나가기 전에 나를 죽여줘. 그리고 그 영혼으로 결계를 부숴.”
그녀의 목소리에 딱히 비장함이 느껴지진 않았다. 차분하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메아리로 변해 홀을 가득 채웠다. 그녀는 내 옆을 스치듯이 지나갔다.
아무것도 몰랐다면, 현실이 그게 아니더라도, 친구로서 너를 대할 수 있었을까. 불가능하기에 슬픈 가정인 걸 알면서도...
나는 그녀의 발소리의 여운이 사라질 때 까지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주머니에 들어있는 두 손이 납덩어리라도 쥔 듯 무거웠다.